보이고 들리는 것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세팔 2008. 12. 11. 01:33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물론 말은 나누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그럴 때면 나는 해변으로 가서 목을 길게 늘여 바람에 머리를 맡기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낡은 단어들과 진부한 언어 습관을 내 머릿속에서 날아가게 하고...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번 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 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랭 골목에서 자신을 이끌어내어 밝은 빛으로 인도하는 이 단어를 사랑했다.

이것보다 더 정신 나간 일이 또 있을까.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갈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

노인이 고양이와 함께 외롭게 살면서 잃어버린 것은, 거리두기와 친근함에 대한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가 우리를 그린다면 서로를 향해 멀리서 팔을 뻗치고 있는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도달하기 위해 헛된 몸짓을 하는 사람들로 그려야 할까? 아니면 보호벽이 되기도 하는 이중 장애물의 존재에 안심하는 모습을 표현해야 할까? 서로를 낯설게 하는 이 보호벽에, 그리고 이 생소함이 가능케 하는 자유에 감사해야 할까? 우리를 분리하거나 조작하는 것이 없어 서로 보는 즉시 와락 달려든다면?

무에서 나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텅 빈 어둠 속에서 조각처럼 빛나던 창틀, 그 창틀에 들어 있는 유령들처럼 스쳐간 것이 정말 한 남자와 여자였던가?

하지만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속임수는 아닐까? 매순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덧없음을 은폐하고 없애려는 시도.

다른 사람에게 뭔가 말을 할 때, 이 말이 효과가 있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을까? 우리를 스치고 흘러가는 생각과 상과 느낌의 강물은 너무나 강력하다. 이 강물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우연히, 정말 우연하게도 우리 자신의 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말을 쓸어내고 지워버린다.

프라두는 다양한 정적을 구별하여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조.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모두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