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고 들리는 것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

세팔 2008. 12. 30. 16:34

'경멸'이란 단어의 재발견이었다.
과연 과거의 수백년전의 우리조상, 특히 먹고 살고 가족으로 이어가기가 삶의 주목적이었던 서민들에게 '경멸'이란 게 존재했을까? '경멸'이란 '지식'의 부산물이 아니던가?

우리가 똑똑해지고 우리가 세련되지기 시작하고 우리가 잘나지기 시작하면서다.
바르고 옳고 똑부러진 현대자본주의 사회에 빨랑빨랑 적응해가며 쌓이는 피로를 어쩌면 우리는 남을 향한 경멸에서 풀고 있을 수도 있다.

경멸은 양날이 되어, 정의감에 불타 남을 향해 휘두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남의 경멸을 받지 않기 위해 늘 불안에 초조해하는 모습. 경멸은 경멸을 낳고 그렇게 경멸에 휩싸여 우리는 외로운 존재가 된다. 다 커서 말이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경멸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최근에 만들어 낸 우리를 억지로 세우기 위해 만든 피상적인 것이라고, 그걸 다 던져버리고 그 이전의 인간인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보자고. 더 이상 '경멸'이라는 것으로 우리사이의 관계를 규정짓지 말자고 외치지 못하는가?

경멸을 경멸한다.
                   <이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
다른 사람들이 존경과 인정을 거두어가면, 왜 우린 그들에게 '그런 건 필요없소. 나 자신만으로 충분하니까'라고 말하지 못하나?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소름끼치는 속박의 한 형태가 아닐까?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닌가? 이런 일을 견디는 댐이나 보루로 어떤 감정을 세워야 하나? 내적인 견실함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나에게 정말 중요한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왜 난 항상 다른 사람들의 말에 무뚝뚝하고 거칠게 굴며 감사할 줄 모를까? 중요한 것을 다른 사람들로 부터 - 그 사람들이 내게서 그걸 뺴앗을 의도가 전혀없음에도 -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한다는 욕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다음에 그 사람들은, 자기만 벌거벗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으려고 오빠도 뭔가 고백하기를 기다렸어요.'난 다른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 기대하는 게 싫다.', ' 도대체 경게선을 긋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드니?'

우리가 타인의 존경과 관심에 의지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고독에 대한 불안에서 나오는 행위인가? 이것이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기 힘든 이유인가? 이 모든 것을 끝낸다면, 비밀스러운 강요와 결별하고 우리 자신의 편에 선다면 과연 무슨일이 벌어질까?

무릎을 꿇은 우리의 소원과 이렇게 노예가 된 소원에 대한 분노가 분수처럼 치솟도록 그냥 둔다면? 우리가 겁을 내는 고독의 원인은 무엇인가?

왜 나에게는 프라두의 친구 조르지 오켈리와 같은 사람이 없었을까? 신의와 사랑에 대해, 그리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제일 허무한 건 욕망이고 그다음이 만족이며, 누군가에게서 보호를 받는다는 편안한 느낌도 언젠가는 결국 부서지는 것이라고... 그래서 감정의 저편에 있는, 영혼의 견해 표명인 신의가 중요하다고...

고통을 당할때 말의 힘이란 금방 고갈되고 마는 거니까.
정신병원에는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가야 하지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사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합격점을 받아야 한다는 부담은 아버지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가! 자신의 단점과 무지와 실수와 비겁함이 아이들의 영혼에 새겨질 것이라는 생각은 또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가!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난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관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여 산다.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도리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사실 사유는 둘째야. 가장 아름다운 것은 詩지. 시적인 사유와 사유하는 시가 존재하는 곳은 낙원일거야
"한계가 없는 솔직함이란 불가능한 것요"
"그건 우리의 능력밖이오. 침묵해야 하기 때문에 고독한 경우도 있는 법이오"

우리는 많은 경험중에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 한다.

원래 하고 싶었던 일에 의식을 집중하기. 흘러가는 유한한 시간에 대한 자각을 자신의 습관과 기대, 특히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위협에 대항할 힘의 원천으로 삼기. 싫어하던 환경을 떠나기. 더 진실해지고 자기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일들을 하기 - 메멘토 모리 - 

상상력/친근함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영혼에 관해서라면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은 얼마되지 않아.

타인은 우리의 말을 우리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증상으로 해석한다. 우리라는 질병에 대한 증상. 타인을 이렇게 관찰하는 일은 흥미로우며 또한 우리를 매우 관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울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기도 한다. 타인도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똑같이 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입을 열러던 순간 말이 목에 걸린다. 그 충격은 우리를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분노를 인색했을 때 그 독에 빠지지 안으며 분노가 우리에게 득이 되도록 하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교육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이다.

그는 이 상황을 즐겼다. 불합리함과 피로, 과장된 쾌감과 경게를 넘어서는 - 지금까지 모르던 - 해방감이섞인 이 상황을 그는 한껏 즐겼다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그레고리우스는 안경을 벗고 머리를 무릎에 묻었다. 눈물이 이끼위에 뚝뚝 떨어졌다. 덧없음. 프라두가 좋아하던 단어가운에 하나라고 말해주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단어를 몇 번이나 소리 내어 발음해 보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단어를 몇 번이나 소리 내어 발음해 보았다. 처음에는 천천히, 나중에는 단어들끼리 서로, 그리고 눈물과도 섞이게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독재적인 친근함. 우리는 친근함 속에서 서로 뒤엉켜 있다. 보이지 않는 끈들은 '자유롭게 하는 사슬'이다. 이 뒤엉킴은독재적이라 독점을 요구한다. 나눔은 배반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만 좋아하고 사랑하고 접촉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친근함을 연출하고, 주제와 말과 몸짓과 함께 나눈 지식과 비밀에 관해 옹졸하리 만큼 꼼꼼한 장부를 써야 하는가?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열린 시선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게으른 존재다. 일상적인 대지에서 호기심이란 희귀한 사치일 뿐... 힘차게 발을 딛고 서서 매 순간 솔직하게 연주할 수 있다면 그런 삶은 예술일 것이다. 우리는 모차르트여야 한다. 열린 미래의 모차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