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미디어
우리는 학습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권력과 복종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세팔
2009. 3. 24. 19:24
큰맘먹고 애들이랑 같이 응원했던 야구결승전.
최악의 스토리로 (지난번과 같이) 끝내고
적들에 둘러 싸여 응원했던 나는 열받아 도서관으로 논문들고 가서 읽고 있는데
<2008년 11월 플로리다 올랜도, 가라는 디즈니랜드는 안가고...
시차 적응못하고 일찍 일어난 호텔에서 카메라 장난질>
인간의 자유가 얼마나 견고한가에 관하여 엄청난 의구심을 품었다.
도서관 끄텅이에서 musculoskeleton system의 다이너믹스를 끙끙거리다가... 야구시합에 의해 열받던 나를 위로해 주는 건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라는 책이라는 생각.
우리 스스로의 존엄성과 자부심의 기초가 되는, 자기 행동과 판단의 자주성이, 사실은 아주 약하다는 사실에 혼자 히죽히죽 웃고 있다. 나의 남들과 사회에 대한 contribution의 기초가 되는, 그런 생각과 행동을 유발시키는 '내 자아'라는 것이 사실은 아주 희박하고 옅은 것이란 점.
최악의 스토리로 (지난번과 같이) 끝내고
적들에 둘러 싸여 응원했던 나는 열받아 도서관으로 논문들고 가서 읽고 있는데
시차 적응못하고 일찍 일어난 호텔에서 카메라 장난질>
인간의 자유가 얼마나 견고한가에 관하여 엄청난 의구심을 품었다.
도서관 끄텅이에서 musculoskeleton system의 다이너믹스를 끙끙거리다가... 야구시합에 의해 열받던 나를 위로해 주는 건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라는 책이라는 생각.
우리 스스로의 존엄성과 자부심의 기초가 되는, 자기 행동과 판단의 자주성이, 사실은 아주 약하다는 사실에 혼자 히죽히죽 웃고 있다. 나의 남들과 사회에 대한 contribution의 기초가 되는, 그런 생각과 행동을 유발시키는 '내 자아'라는 것이 사실은 아주 희박하고 옅은 것이란 점.
나의 잘남도 안도도 남에 대한 미움과 자랑스러움도 모두 '나'라는 존재가 실지 내 자신에 의한 '나'라는 존재, 자주적인 '나'라는 존재임을 가정함에서 나온 것이며, 그러한 내 자신의 자주성이 짙어 보이면 짙어 보일 수록 자존감과 뿌듯함의 미소가 점점 귀밑에 까지 뻗칠 수 있는 것인데,
'정신'보다는 주변/사회적 '맥락'이 더 중요하다면, '씨앗'보다 '환경'이 더 중요하다면, 그래서 실은 내 모든 정신적 자산의 기초인 자주성이, 실은 아주 미약하고 옅다면. 나는 그리 자주적인 인간이 아닌 옅어서 사라질 것 같은 존재, 주변에 따라 쉽게 움직이고 마는 존재라면.
그런데 왜 그 사실이 해방감을 주는 것일까?
사실 자체가 주는 해방감인가,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개념을 또 한계단 위에서 인식했다는 해방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