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택가는 길의 길상사역앞, 봄이 한참 지나가고 있는 나날들이다. 오랜만에 アサヒカメラ잡지를 사서, 간만에 사진심(寫眞心)을 돋우어 보고..>
상구동(像驅動, Image Driven).
접때도 적었다만, 사람중엔 상구동(像驅動)인 사람과 의구동(義驅動)인 사람이 있다.
물론 중간의 어정쩡한, 내지는 자기가 무언가에 구동되는지도 모른 사람이 더 수두룩 하지만.
철저한 상구동(像驅動)인 나를 황홀하게 하는 날들이다.
며칠전, 집에 오는 길 -아, 얼마나 그걸 블로그에 적고 싶었던가 - 에 바라 보던, 서쪽을 향한 길이 부우여 지도록 내리던 석양빛과 적색 태양. 공원에 논문 읽고 있을 때 물어 주었던, '처음'이라는 바람
죽었다 깨어나야 겨우 될 것 같은 게 -내지는 그래도 안되는 게 - 상구동(像驅動)인 사람이 의구동(義驅動)인 사람이 되는 것. 그걸, 나는 얼마나 되려고 했던 날들이 있었나
철저한 상구동은 위험하다. 그런 삶을 철했던 사람들은, 몇몇 뛰어난 예술가로 불리기도 한다만, 19세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21세기엔, 그나마 예술가가 되기 위해선 엄청난 자기 억제가 필요해진다.
그렇다고, 내안에 일어나는 이미지를 부인해서는 안된다. 바람하나에 간판하나에 글 한구절에 내머리안에 하늘을 가르고 폭발하듯이 일어나는 이미지를 이젠 더이상 억압해서는 안된다.
거기에 의존하거나 빠져 살지는 않지만, 가끔씩 폭발할때는 막지말고 앉아서 폭발시켜라.
어디론가 몰고 갈 땐, 가끔씩 따라가 주어라.
그러다가, 때론 너 스스로가 그 像이라는 것을 불러 주어라.
일할때는..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보스턴의 커피숖에 앉아서 소위 공부벌레들이라 불리는 애들이랑 같이 공부하고 있다는 상상을 한다든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코제이의 영어책 읽는 이미지에서 어떤 모티베이션을 얻는다든지
그러다가 보면,
내가 논문 구조를 생각한다고 노트에 끄적인 것들을 들고
이미 적어 놓은 논문의 구조와 비교해 가며 마지막 논문구조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는 그 '작업'이란 것도 그럴 듯하게 보여온다.
<하북택의 커피숖>
<비온뒤의 하북택. 2004년 발매, 디카시장에선 사라진 쿄세라 콘탁스의 U4R을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이색감 때문>
남들은,
또 죽었다 깨어나도 못되는 게, 상구동이다.
오늘, 내가 바라보고 나를 흥분시켰던 像은 무엇인가?
내가 만들어야 하는 像은 무엇인가?
여지껏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바 되는 거대한 像인 것은, 그 형체를 표상화 시켜야 하는 것이란, 남들은 말로만으로 그치고 있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그걸 위해, 가슴이 뜨거워 지는 게 像驅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