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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동미

내가 만든 미디어

by 세팔 2009. 5. 29.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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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나의 발언은 내 이기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정신적 향상심이 없는 놈은 바보같은 놈이지"
나는 두번 그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말이 K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지켜보았습니다.
"바보같은 놈이야"라고 K가 겨우 답했습니다.
"난, 바보 같은 놈이야"
....
그러나. 그날 밤 K는 자살을 해버렸습니다....
..

나는 즉시 책상위에 있는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내이름 앞으로 된 편지였습니다. 나는 정신없이 봉투를 뜯었습니다. 그렇지만 안에는 예상했던 것 같은 내용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참기 힘든 어떤 괴로운 문구가 그안에 넘치게 적혀있을 걸로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집주인 아주머니와 그 아가씨가 보게 된다면 얼마나 멸시를 받을 지, 그런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일단 대략 훑어보고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체면치레상 '다행'한 일이지만, 이 체면치레라는 것이 내게 있어서 중요한 일로 보였던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추상적이었습니다. 자기는 박지약행 [薄志弱行] 해서 도저히 장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아 자살한다는 내용뿐이었습니다.

나는 돌연 K의 머리를 싸안듯 양손으로 조심스레 들어올렸습니다. 나는 K의 죽은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엎드려져 있는 그의 얼굴을 밑에서 올려다 보고는 나는 곧 손을 떼었습니다. 끔찍했던 것 뿐만은 아닙니다. 그의 얼굴이 아주 무겁게 느껴졌었습니다. 나는 위에서 지금 만져본 차가운 귀와 평상시와 다르없는 짧게 깎은 짙은 머리털을 잠시 지켜보았습니다. 나는 조금도 울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단지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 두려움은 눈앞의 광경이 관능을 자극해서 일어나는 단순한 두려움은 아닙니다. 나는 갑자기 차가와진 이 친구에 의해 암시된 운명의 두려움을 깊게 느꼈던 것입니다.
<나쯔메 소오세끼, 마음>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마"
정신적 향상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자기를 변호하기에 급급한 우리가 외치는 소리.
...
...

본적으로 우리의 배움은
"그러고도 너 가만히 있었냐? 미쳤냐? 녀석들에게 본떼를 보여줘야지. 똑같이 나가라구!"
이다.

자기의 '모순'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걸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란 자체가 없으며 남들이 자기에게 하는 내 모순에 대한 이야기란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린다.

싫컷 거짓말을 하고도 '저녀석들이 먼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정당화가.
정말로 미안함이라는 감정하나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당당하게 정당화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모순'에 대한 감각을 잃은지 오랜지다.
내야할 세금 안내고, 지켜야 할 법규를 안지키고도 "나만큼 세금과 법규 잘 지키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소리를 탕탕칠 수 있으며, 쳐먹을 것 쳐먹고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이나 해대는 자기 모순을 모르는 아저씨들같은, 우리를 착하게 만들어 주는 정당화의 기준이 될 사람들이 흘러넘친다.

내자신의 '모순'을 이렇게도 아무런 감각없이 남의 이야기로 돌리는 우리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자기모순의 없음으로 그나마 앞장서 나감의, 리더가 되어있음의 근거로 하려던 분이, 자의든 타의든 자기에게서 보여지는 '모순'을 참지 못하고 목숨을 끝으셨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나만큼 세금 잘내고 법규를 잘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라고 외치면서도 '지못미'를 추모행렬속의 어느 벾에 적고 왔다고, 나는 민주주의자라 자기의를 만끽하며 또다시 '모순'을 정당화 시킬 마음의 벽을 두텁게 칠한다.

세상의 '자기모순'이 얼마나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지를 보고 스스로의 '자기모순'에 대항하려고, 
'자기모순'에서의 탈피만이 그나마 진정한 민주주의에의 한걸음임을 보여주려고, 
행여나 스스로에게도 비추어져 버린 '자기모순'때문에 사람들이 또 다시 둔감해 질까봐 
29만원같은 아저씨가 있다고는 하나 '나보다 더 심한놈 있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냐'고 하지 않고,
29만원과는 상관없는 자신의 할일을 알고는 걱정에 '나를 버리셔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렇게 타일러도 끝까지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죽어서나마 '자기모순'을 벗어나 보려한 그분한테, 
그분이 싫어한 자기모순을 너무나도 둔감하게 몸에 감싸고 있는 우리가 해야할 말은 '지못미'가 아니라 '죽동미'가 아닐까?

철면피같은 '우리의 모순'을 벗어나야만 한다고 죽음으로 나마 길을 보여주려한 그분한테, 내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착같은 우리는, 오히려 그 모순을 남에게 밀어 붙이기 위해 지금도 이기심의 발현을 철면피처럼 하고 있는 우리는
'죽이기에 동참해서 미안합니다'
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너 미친거 아냐? 누구 좋은일 시킬려고 그딴말하냐? 문제는 놈들이라고! 본떼를 제대로한번 보여 줘야해. 그래야 정신차리지"

자기모순을 이길 수 있는 건 자기 부인이다. 그래서 고인은 그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자기모순으로 비추어지는 스스로의 모습이 더이상 민주주의로 비추어질 수 없음을 (남들이야 실컷 민주주의로 본다고 해도) 스스로 자책하며 자기 부인으로 다시한번 길을 보여 주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그래도.
우리는 자기 부인에 관심이 없다. 그건 남만 좋은일이 된다.
그리고 타인의 '자기부인'엔 관심이 많다. 앞장서 있는 사람들,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선생이든 가끔은 연예인까지.

그들의 자기부인없음을 아주 매설치게 밀어 붙인다. 때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고나면 '지못미'한마디 던지고는 낼름 자기의라는 단물을 한번 핥아먹고, 다음 죽일 사람을 찾는다.
정작 자기스스로의 자기부인은 손해보기는 죽으라고 싫어하는 우리가 말이다.

"죄송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내요. 제가 이런부분에서 잘못되었습니다. 
같이 생각하며 고쳐나가도록 잘해봅시다."

어떤게 고인의 목소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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