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생각은 둘째치고, 감정조차 만들어 내지 못하는 현대인이다.
우리의 감정은, 지키거나 관리함을 받지 못하고 그걸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다.
분개
분노
증오
죽음을 무릎 쓴 적대감
물론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위의 단어를 언급하며 감정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정의, 공의, 도덕, 윤리
와 같은 밝은 면의 단어들을 이용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감정들은 쉬운 감정들, 즉 스스로 수고를 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감정, 그렇지만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정치인, 종교인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공의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분노하는 건, 정치와 종교때문이다.
그들은 편을 가르고, 우리의 선을 지키기 위해서 상대를 악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악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마음껏 열도록 불을 지핀다.
불이 붙은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스스로의 감정을 한번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감정을 완화시키려는 의도로 파악하고, 이런 이야기조차 상대의 악을 옹호하는 의견으로 판단하며 스스로의 분노를 더욱 강화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이 감정은 분노이고 증오임에도 불구하고, 정의라는 뒷맛으로 인식되고 기억되기 때문이다.
정의라는 덕목을 가장 손쉽게 실천하는 방법이 바로 증오이기 때문이다.
내가 손해 볼 것은 없다.
그리고 나는 정의를 위한 실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 후련하고 나를 뜨겁게도 만든다.
게다가 순수하게 까지 느껴진다.
이것이 증오라는 것이다.
증오는.
쉬운 감정이라, 모두에게 쉽게 전염이 된다.
어려운 감정은
시간을 들여 만들어 내는 감정이다.
손쉽게 금방 얻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도중에 불안이라는 감정도 지나게 되고, 걱정이라는 감정과도 같이 있다.
주변의 사람과 같이 불타오르게 되는 일 없이, 혼자 남아서 주변과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한 감정도 지나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서야 얻게 되는 감정은, 미디어가 던져 주는 미끼를 덥석덥석 먹으면서 키우는 감정과는 다르다.
남들과 쉽게 공유되지 않지만 (그런 감정을 가져 본 사람이 적다) 혼자서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는, 성취하기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볼 수 있는 감정
절대 다수의 사람이 manipulate된 한가지 감정으로 달리고 있는 시기이다.
한번 다 비우고, 스스로 채워 나가는 감정을 길러 보고 싶은 시기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