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숨기고 있었지만,
달려가고 길길이 날 뛸 수 있는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결국 그것이 아닌가?
찾아도 찾아도 허덕거리게 되고 피폐할 뿐인 우리 삶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갈망의 시절 갈등의 계절이다.
내가 찾아 다니던 것은 ‘점프’이고 ‘워프’였다. 빠알갛게 물드는 도심의 빌딩벽을 통해서, 한용운님의 이야기 대로 희끗희끗 보이는 하늘구멍 사이로, 한낮의 열기가 밤에는 해가 지며 이렇게 냄새로만 남는구나 했던 타카마쯔의 해안가 지는 석양속을 집중하고 있으면 거기서 메타포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또 선배들이 남긴 몇 문장속에선 손쉽게 어디론가 점프할 수 있었고 워프를 할 수 있었다. 신쥬꾸 패밀리 레스토랑 구석에서 읽던 글속에서 갑자기 영국 어느 시골 묘지로 워프했고, 닛뽀리의 어느 일본어 학교 독서실에서 읽던 글속에서 70년대 한국으로 쓰으윽 점프해 꿈같은 시간을 지내었었다. 박혀진 문장 몇군데에서 나는 몇가지 사회의 본질들과 인간들의 헤어날 수 없는 intrinsic한 반복되는 문제점의 세계로 마구 날아 다님을 즐겼다.
No nothing. Just be out there. Just be out there in it. You know, big mountains, rivers, sky, game. Just be out there in it, you know? In the wild.
그래도, 혼자 내팽겨쳐 보았던 알지도 못하던 이국거리에서의 헤멤속에서도, 2시간이나 혼자 앉아 바라보던 동경 타마가와에서도 아무리 워프를 해보아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는 없었다.
Warp-fatigue만 남을 뿐.
이 3년간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머리 속에 다음 워프를 기다리던 개념들이, 뚝뚝하고 내 문장으로 되어 버리는 과정을 거치다가 보면 어느새 개념은 워프할 능력을 잃고 만다. 또 다른 피폐를 안겨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이 워프 자체의 의미까지 생각하게 되는
이 3년간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벌형제 조르지오와 카를로의 웅웅거림 같은 답답함만 있을 뿐, 아무리 워프를 하고 날아 다니며 도착해 잠시씩 머물렀던 어떤 곳의 어떤 밤도 헐떡거림만 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