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아지 같은 내 정신을 한 곳에 모으고 있는 요즘은.
나이와 더불어
더이상 정신도 망아지 짓 만을 하고 있을 수 없는 터라
애써 달래가며 한 곳으로 몰아가는 곳이 있다면.
'아가야,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란다.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현실이란, 물론 헛 것일 수 없다... 인간이란 의식인 것. 의식이 정신으로 발전하고, 이 정신의 작용은 온갖 힘을 기울여 현실과 이상을 연속적으로 변증법적으로 극복해 간다'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네. 왜나고? 존재하는 것이란 이성이기 때문이지'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시나가와역',김윤식(이하)
오오에도 오오에지만, 역시 김윤식교수이던가.
김윤식교수와의 첫만남의 '내 스무살을 울린 책'의 첫글을 담당했던 그의 글이었다.
앙드레지드의 '지상의 양식'의 소개.
이미 절판된 줄 알았던 '내 스무..책'에 소개된 오래된 그 표지 그대로의 1978년 초판된 그 책을, 나는 대구 시내 어느 책방에서 싹쓸이 되는 도중에 건져 일본으로 갖고 왔고 나다나엘에게 주던 그 모든 조언은 나의 정신을 위에서 부터 쪼개 놓았다.
20대의, 나도 모를 분함에 잠못 이루던 밤에 얼마나
‘나타나엘이여, 공감 (共感)이 아니고 사랑이어야 한다.’
라고 외쳐대었던가. 그리고 아직도 나는 몽유병환자같이 읊조리고 있다.
'자각적 정신으로서의 이성과 현존하는 현실성으로서의 이성을 구별하여 현존하는 현실성으로서의 이성 안에서 만족을 발견하지 않게 하는 것은 개념에까지 해방되어 있지 않은 어떤 추상적인 구속이라는 것.
이성을 현재의 십자가에 있어서의 장미로서 인식하고 이로써 현재를 기뻐하는 것.
이 이성적인 통찰이야말로 개념을 가지고 파악하려고 하고, 실체적인 것 안에 주관적인 자유를 갖고자함과 동시에 그 주관적 자유의 소재를 특수적인 것의 우연적인 것 안에서가 아니라 즉자 및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 안에 두고자 하는 내적 요구가 한번 생긴 사람들에게 철학이 주는 바 그 현실성과의 타협인것.'
오랜만에 붙잡은 김윤식 교수의 글이 또 묘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가 동경에서 느꼈다던 숨막힘이 나와 같은 종류의 숨막힘이라 할 수 없다하더라도 행여나 그가 찾았다던 답에서 나도 답과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웃거리게 된다.
'오해하지 말게나. 자각적 정신으로서의 이성과 현존하는 현실성으로서의 이성 틈에 끼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치거나 죽어갔던가. 자각적 정신으로서의 이성이 현존하는 현실성으로서의 이성과 맞설 수 있는 균형감각 획득이야말로 철학의 몫이라는 것. 전자의 미숙함이 후자의 압도적/과잉적 힘에 의해 패배하는 것, 그것이 이명준의 비극이 아니겠는가.
혹, 그가 말하는 철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려나? 물론 내게는 그렇지 않다. 내게는
gear가 필요하고 friction이 존재한다.
함부로 날라리처럼 대자를 즐기려 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즉자임을, 즉자속에 존재하는 힘을 자꾸 깨우쳐주어라.
그러기에 아가야, 이명준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한다면 도서관 서고 속으로 다시 돌아가거라. 내가 가르치고 싶은 것은 되풀이된 명제 그대로이다.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춰라"
나의 서고엔, 죽은 귀신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모르는 장미들만이 있는 터라. 나의 춤은 싸늘하기만 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붙잡아야 함은?
나를 이어줄 무언가를 찾아야 하기 때문인가?
그나마 이성이 현실이 되어준다면, 나는 어딘가에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인가?
이걸로 또 한 꺼풀 벗겨낼 수 있다면...